(73) 해인사 팔만대장경

2023.05.26 03:00 입력 2023.05.26 03:03 수정
김찬휘 녹색당 대표

770년의 세월 건너온 고려의 국난 극복 염원…지금도 유효하다

팔만대장경의 1971년(왼쪽 사진·셀수스협동조합 제공)과  2021년 (위쪽·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제공)의 모습.

팔만대장경의 1971년(왼쪽 사진·셀수스협동조합 제공)과 2021년 (위쪽·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제공)의 모습.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장악하던 ‘무신정권’의 시기.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꿔 놓을 정복전쟁을 시작한 몽골제국은 1231년 고려를 침공한다. 이로써 28년간 9차례 침략으로 이어지는 ‘여몽전쟁’이 발발한다. 수도 개경이 포위당한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복하고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했고, 이에 2차 침략이 발발한다. 강화도 천도는 결사항전의 표시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우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이미 군사력의 절대적 격차를 경험한 조정에서는 전란을 끝내자는 ‘현실론’이 제기됐지만 정권은 권력의 붕괴를 우려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정의 강화도 칩거 27년 동안 육지는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용감한 장수와 백성들의 대몽 항전이 있었던 반면, 지방 관리들과 농민 및 노비들은 민심을 잃은 조정에 대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몽골군은 국토를 유린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1235년 3차 전쟁이 발발하자 조정은 주민들을 험준한 산성이나 외딴 섬으로 이주시키는 ‘입보 정책’으로 몽골에 저항토록 했지만 백성들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조정은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했다.

11세기에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대장경이 만들어졌는데, 이 ‘초조(初彫)대장경’이 몽골 2차 침략 때 불타버렸다. 이에 몽골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대장경의 복원, 즉 ‘재조대장경’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1251년에 마침내 완성된 목재 경판 수는 무려 8만1258장. 이리하여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은 1398년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팔만대장경이 최우 정권에 의해 시작됐고, 최씨 집안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권 유지의 도구라고 폄하하거나, 전란 속에서 종교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재단하는 것은 오류다. 대장경 제작엔 승려, 관리, 평범한 백성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국가적 재난을 불심으로 단결해 극복하려 한 모든 고려인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2021년 6월,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에 봉안된 지 620여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770년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대장경은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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