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 윤성준 감독 <영화평> '아홉스님'이 주는 육바라밀을 통한 인간으로의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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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52회 작성일 20-06-30 16:59본문
우리는 지금보다 분명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
[메가경제신문= 박정인 해인예술법연구소장]인간이 사는 세상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상이며 서로의 계산과 이해관계라는 어둠이 혼돈으로 이끌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 가운데 존재의 이유를 잃은 중생은 세상을 어쩐지 아무런 붙잡을 것이 없어 등지기도 한다. 여기에 종교의 모습을 한 힐링다큐 무비 '아홉스님'은 우리가 잊었던 인간으로 살아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사리자야, 물질은 비물질이고, 비물질은 곧 물질이다. 물질은 비물질과 다르지 않고, 비물질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는 공이고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단다.”
영화는 아홉스님이 머리를 깎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수행자는 세속인과 달리 천막에서 동안거하며 고행의 길을 걷기로 합의하고 무문(문이 없는) 천막에서 새는 비를 맞으며 추운 겨울 일종식(하루 한 끼)과 옷 한 벌로 삭발, 목욕, 대화가 금지된 상황에서 90일을 견딘다. 이 과정에서 육바라밀(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을 행하는 모습을 담담히 보여준다.
이러한 청규를 어길시 승적을 박탈당하겠다는 상월선언 이후 음력 10월 15일부터 90일간 정진은 세속에서 하고 있는 많은 사념에 돌 하나를 던진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기댄다. 그리고 위로를 기대한다. 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정진하여 스스로의 그릇을 빚으라고 말한다. 아홉스님(자승, 무연, 진각, 성곡, 호산, 재현, 심우, 도림, 인산)은 그와 같이 우리 인간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위한 수행을 제안한다.
1. 묵언수행
묵언수행은 육바라밀 중 오직 타인의 배려, 보시(布施)만이 남고 자신은 사라지는 과정에서 언어뿐만 아니라 소리, 표정까지도 누군가를 투영하는 습자지처럼 오직 마음을 닦는 일 외에는 할 수 없게 만든다.
2. 배고픔과 추위, 아픔을 넘어서는 수행
스님들은 비가 샌 뒤, 추위 속에 아예 천막으로 햇빛이 가려짐에 대해, 햇빛이 그토록 그립고 오직 냉기를 막아주는 물통에 체온을 유지한 채 텐트 안에서 영하 7도라는 추위에 맞닥트리며 실제 추위라는 살아움직이는 대상과 싸운다.
또한 배고픔이 엄습하자 탕비실에 먹을 것이 없음에도 기웃거리고 싶고 커피믹스 두 봉지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한 스님의 모습에서, 식탐으로 죽은 목구멍이 밥이 넘어갈때마다 찢어짐에도 먹고자 하는 아귀와 같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 스님의 곡물을 끊어내는 단호함, 가슴의 통증이 왔음에도 응급실에 가면 다른 여덟스님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 우려되어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강인함 속에서 스님들은 지계(持戒)를 다한다. 즉, 스스로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해 받아들인 계율을 깨지 않으려는 온 힘을 다한 무서운 집중력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통째로 울리고 우리와 같지만 다르고자 노력하는 수행자의 모습에 존경으로 고개 숙이게 된다.
3. 고요함의 진정한 의미
밖에는 야단법석을 행하고, 위례의 공사장 한 가운데 천막이라 쉬지 않고 공사소리가 들려와도 정확하게 수행시간을 지키며,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청소하고 수행의 남는 시간에 요가 등 운동을 함으로써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는 스님들의 수행은, 고요함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해준다.
소리에서 벗어나는 인욕(忍辱)의 수행 앞에 아홉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욕이나 고통, 번뇌나 박해를 능히 견디고 참아서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평안하게 하는 인욕 수행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밖은 시끄러워도 내 마음은 고요한, 세속에서 밖은 아무리 조용해도 내 마음은 시끄러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어제와 오늘의 한결같은 정신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4. 정진이 다른 사람에게 가져오는 영향
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수행을 함에도 수행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선원장 스님은 인공지능 로봇수행자이다’라는 찬반투표 대목에서 보다시피 한 치의 게으름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스님들은 그에 힘입어 더 허리가 빳빳하게 앉아 동안거 정진을 한다.
이러한 정진은 어떤 불평불만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오직 연비의식과 같이 내 몸을 그 자체로 소신공양하는 자세, 자연의 하나로서 인간의 소임을 잊지 않고 나만 다르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계율의 수용 앞에서 가능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선한 영향력은 주변 사람들도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살 수 있는 신뢰를 가져와 함께 정진하며 살기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5. 24시간의 용맹정진으로 가져오는 집착의 사라짐
24시간 용맹정진으로 들어가는 스님들은 모든 것을 걸고 해보자는 자세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눕지 않는 선정(禪定) 수행에 임한다. 그들은 죽비로 졸음을 쫓으며 죽비의 울림에 이어진 자신의 몸의 울림에서 혹독하게 생각을 몸에서 끊어내며 그리하여 끊임없이 구별하고 차별하는 모든 생각의 장애를 극복하여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
6. 90일의 마지막 죽비가 의미하는 것
자신을 한 호흡으로 관리하여 첫날과 마지막날을 하루와 같이 만든 아홉스님의 정갈한 모습은 동안거 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보이지 않으나 그들은 반야(지혜)를 얻었음을 상징한다.
대웅전에서 부처님 앞에 서서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하고 오바라밀을 통해 그러한 반야를 얻은 스님들은 그 모습을 헌혈이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한다.
인생은 모르고는 살 수 있지만 앞날을 모두 알고 사는 것은 오히려 재앙이다. 그리하여 회향길에 우리의 기억은 모두 그렇게 사라지나 보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다시는 세속을 돌아보지 않고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한다.
도림스님은 90일 후에 세상에 나와 맞았던 햇빛은 그저 단순한 햇빛이 아니라 손이 있어 어루만져 주는 그런 햇빛이었다고 말하며, 인산스님은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물을 흘리며 첫 출가시 행자실에서 일주일간 방에 벽만 보고 있은 후 했던 3천배 때나 흘렸던 눈물과 같은 눈물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초심이라는 순수로 돌아가 마음의 때가 벗겨져 세상과 일체로 살아가는 수행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우리의 세상이 이와 같이 처음 나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며 허영과 관념에서 벗어나 집착에서 벗어나 한데 어우러지던 그 처음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의 수행처럼 사회도 자정작용을 하고 국가도 보편적 법칙이 인정되어 세상의 많은 분쟁과 혼돈이 그래도 조금은 원만하게 조정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는 아홉스님의 삭발에서 시작하여 아홉스님의 동안거한 천막이 해체되면서 끝나듯이,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비웃으며 또 다시 우리에게 가능성만을 희망의 메시지로 던지며 끝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여전히 세속 안에 있지만 아홉스님의 90일 수행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보고 우리의 때묻은 얼굴을 세안하고 거울 앞에 맑은 마음으로 앉기 위해 노력하게 해줄 것이다.
이 영화는 한때 목사를 꿈꾸었던 윤성준 감독의 입봉작품으로 종교의 장르를 넘어 일반인 모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불교를 하나의 김치찌개 레시피처럼 제안하는 어렵고도 쉬운 영화이다. 무소유의 불교를 맛깔스럽게 담근 만큼 윤 감독의 정신세계 역시 “셀수스와 함께하는 미래의 다큐 감독 선발 공모전” 1위 감독을 한 본모습답게 현재 무상공유 카피레프트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셀수스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향후 윤성준 감독이 코로나를 뚫고도 다큐의 흥행을 보여준 저력으로 어떠한 강렬하고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 행보를 걸을지 진심으로 기대된다.
출처 : 메가경제신문(http://www.megaeconomy.co.kr)
[메가경제신문= 박정인 해인예술법연구소장]인간이 사는 세상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상이며 서로의 계산과 이해관계라는 어둠이 혼돈으로 이끌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 가운데 존재의 이유를 잃은 중생은 세상을 어쩐지 아무런 붙잡을 것이 없어 등지기도 한다. 여기에 종교의 모습을 한 힐링다큐 무비 '아홉스님'은 우리가 잊었던 인간으로 살아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사리자야, 물질은 비물질이고, 비물질은 곧 물질이다. 물질은 비물질과 다르지 않고, 비물질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체는 공이고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단다.”
영화는 아홉스님이 머리를 깎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수행자는 세속인과 달리 천막에서 동안거하며 고행의 길을 걷기로 합의하고 무문(문이 없는) 천막에서 새는 비를 맞으며 추운 겨울 일종식(하루 한 끼)과 옷 한 벌로 삭발, 목욕, 대화가 금지된 상황에서 90일을 견딘다. 이 과정에서 육바라밀(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을 행하는 모습을 담담히 보여준다.
이러한 청규를 어길시 승적을 박탈당하겠다는 상월선언 이후 음력 10월 15일부터 90일간 정진은 세속에서 하고 있는 많은 사념에 돌 하나를 던진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기댄다. 그리고 위로를 기대한다. 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정진하여 스스로의 그릇을 빚으라고 말한다. 아홉스님(자승, 무연, 진각, 성곡, 호산, 재현, 심우, 도림, 인산)은 그와 같이 우리 인간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위한 수행을 제안한다.
1. 묵언수행
묵언수행은 육바라밀 중 오직 타인의 배려, 보시(布施)만이 남고 자신은 사라지는 과정에서 언어뿐만 아니라 소리, 표정까지도 누군가를 투영하는 습자지처럼 오직 마음을 닦는 일 외에는 할 수 없게 만든다.
2. 배고픔과 추위, 아픔을 넘어서는 수행
스님들은 비가 샌 뒤, 추위 속에 아예 천막으로 햇빛이 가려짐에 대해, 햇빛이 그토록 그립고 오직 냉기를 막아주는 물통에 체온을 유지한 채 텐트 안에서 영하 7도라는 추위에 맞닥트리며 실제 추위라는 살아움직이는 대상과 싸운다.
또한 배고픔이 엄습하자 탕비실에 먹을 것이 없음에도 기웃거리고 싶고 커피믹스 두 봉지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한 스님의 모습에서, 식탐으로 죽은 목구멍이 밥이 넘어갈때마다 찢어짐에도 먹고자 하는 아귀와 같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 스님의 곡물을 끊어내는 단호함, 가슴의 통증이 왔음에도 응급실에 가면 다른 여덟스님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 우려되어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강인함 속에서 스님들은 지계(持戒)를 다한다. 즉, 스스로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해 받아들인 계율을 깨지 않으려는 온 힘을 다한 무서운 집중력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통째로 울리고 우리와 같지만 다르고자 노력하는 수행자의 모습에 존경으로 고개 숙이게 된다.
3. 고요함의 진정한 의미
밖에는 야단법석을 행하고, 위례의 공사장 한 가운데 천막이라 쉬지 않고 공사소리가 들려와도 정확하게 수행시간을 지키며,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청소하고 수행의 남는 시간에 요가 등 운동을 함으로써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는 스님들의 수행은, 고요함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해준다.
소리에서 벗어나는 인욕(忍辱)의 수행 앞에 아홉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욕이나 고통, 번뇌나 박해를 능히 견디고 참아서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평안하게 하는 인욕 수행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밖은 시끄러워도 내 마음은 고요한, 세속에서 밖은 아무리 조용해도 내 마음은 시끄러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어제와 오늘의 한결같은 정신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4. 정진이 다른 사람에게 가져오는 영향
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수행을 함에도 수행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선원장 스님은 인공지능 로봇수행자이다’라는 찬반투표 대목에서 보다시피 한 치의 게으름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스님들은 그에 힘입어 더 허리가 빳빳하게 앉아 동안거 정진을 한다.
이러한 정진은 어떤 불평불만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오직 연비의식과 같이 내 몸을 그 자체로 소신공양하는 자세, 자연의 하나로서 인간의 소임을 잊지 않고 나만 다르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계율의 수용 앞에서 가능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선한 영향력은 주변 사람들도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살 수 있는 신뢰를 가져와 함께 정진하며 살기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5. 24시간의 용맹정진으로 가져오는 집착의 사라짐
24시간 용맹정진으로 들어가는 스님들은 모든 것을 걸고 해보자는 자세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눕지 않는 선정(禪定) 수행에 임한다. 그들은 죽비로 졸음을 쫓으며 죽비의 울림에 이어진 자신의 몸의 울림에서 혹독하게 생각을 몸에서 끊어내며 그리하여 끊임없이 구별하고 차별하는 모든 생각의 장애를 극복하여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
6. 90일의 마지막 죽비가 의미하는 것
자신을 한 호흡으로 관리하여 첫날과 마지막날을 하루와 같이 만든 아홉스님의 정갈한 모습은 동안거 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보이지 않으나 그들은 반야(지혜)를 얻었음을 상징한다.
대웅전에서 부처님 앞에 서서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하고 오바라밀을 통해 그러한 반야를 얻은 스님들은 그 모습을 헌혈이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한다.
인생은 모르고는 살 수 있지만 앞날을 모두 알고 사는 것은 오히려 재앙이다. 그리하여 회향길에 우리의 기억은 모두 그렇게 사라지나 보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다시는 세속을 돌아보지 않고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한다.
도림스님은 90일 후에 세상에 나와 맞았던 햇빛은 그저 단순한 햇빛이 아니라 손이 있어 어루만져 주는 그런 햇빛이었다고 말하며, 인산스님은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물을 흘리며 첫 출가시 행자실에서 일주일간 방에 벽만 보고 있은 후 했던 3천배 때나 흘렸던 눈물과 같은 눈물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초심이라는 순수로 돌아가 마음의 때가 벗겨져 세상과 일체로 살아가는 수행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우리의 세상이 이와 같이 처음 나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며 허영과 관념에서 벗어나 집착에서 벗어나 한데 어우러지던 그 처음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의 수행처럼 사회도 자정작용을 하고 국가도 보편적 법칙이 인정되어 세상의 많은 분쟁과 혼돈이 그래도 조금은 원만하게 조정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는 아홉스님의 삭발에서 시작하여 아홉스님의 동안거한 천막이 해체되면서 끝나듯이,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비웃으며 또 다시 우리에게 가능성만을 희망의 메시지로 던지며 끝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여전히 세속 안에 있지만 아홉스님의 90일 수행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보고 우리의 때묻은 얼굴을 세안하고 거울 앞에 맑은 마음으로 앉기 위해 노력하게 해줄 것이다.
이 영화는 한때 목사를 꿈꾸었던 윤성준 감독의 입봉작품으로 종교의 장르를 넘어 일반인 모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불교를 하나의 김치찌개 레시피처럼 제안하는 어렵고도 쉬운 영화이다. 무소유의 불교를 맛깔스럽게 담근 만큼 윤 감독의 정신세계 역시 “셀수스와 함께하는 미래의 다큐 감독 선발 공모전” 1위 감독을 한 본모습답게 현재 무상공유 카피레프트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셀수스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향후 윤성준 감독이 코로나를 뚫고도 다큐의 흥행을 보여준 저력으로 어떠한 강렬하고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 행보를 걸을지 진심으로 기대된다.
출처 : 메가경제신문(http://www.mega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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