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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9회)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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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31회 작성일 22-03-0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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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흔히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은 조선 왕조 성곽의 축성과 동시에 기공되어 태조 7년인 1398년에 한양의 다른 세 개의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최고 덕목인 ‘인의예지’에 맞춰 동서남북의 성문 이름을 붙였는데, 그래서 동쪽은 흥인지문, 서쪽은 돈의문, 남쪽은 숭례문이 되었다. 북쪽에 홍지문을 짓는 것이 정도전의 원래 계획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개혁과 정화’의 의미를 지닌 숙청문을 짓게 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자리를 옮겨 지어 지금의 숙정문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1398년의 숭례문은 헐리고 세종 30년 1448년에 신축 완공이 되었는데, 숭례문은 이 모습으로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의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 일본 왕세자가 방문하자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모두 헐어버렸지만 정작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일종의 ‘개선문’이라는 것이 헐리지 않은 이유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34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숭례문이 ‘보물 1호’로 선정된 경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62년 남대문이 한국전쟁 때의 파괴를 복구하여 중수 중일 때 ‘국보 1호’로 지정된 것도, 단순한 관리번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번호를 따른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숭례문을 국보 1호에서 변경하자는 주장이 여러 번 제기되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서울시는 2006년 3월3일 숭례문의 중앙 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했는데, 그것은 2년이 못 가서 방화로 크게 소실되는 문을 연 셈이 되었다. 수백 년의 세월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전쟁의 포탄도 이겨낸 숭례문이 한 사람의 라이터와 시너는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50년이 지나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숭례문의 모습은 2013년에 복구된 것이다. 선명한 단청으로 차려입은 숭례문의 모습은 크게 훼손당한 상처 자국을 감추려는 안간힘 같아 보여 마음이 아프지만, 의연히 서 있는 그 자태만으로도 서울 시민들은 위안을 받는다.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바뀌어서 이제는 더 이상 ‘국보 1호’도 아니지만,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숭례문은 영원히 국보 1호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304030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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