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이 무상제공한 사진으로 쓰여진 법보신문 칼럼 <원각사지십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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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치영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전 민족이 궐기한 3·1운동은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이를 출발점으로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탑골공원은 원래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다.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 신앙이 깊었던 세조가 근처의 민가 200여 호를 허물어 절을 크게 새로 짓고,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원각사는 도성 안 최고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구리 5만 근으로 만든 거대한 동종, 분신 사리와 ‘원각경’을 봉안한 높은 대리석 탑이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이곳으로 궁중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는 장악원을 옮기며 연방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의 유흥에 동원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도록 함으로써 원각사는 절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연산군이 실각한 후, 건물들은 헐려 다른 관공서를 짓는 데 쓰였고, 1962년 국보 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십층석탑과 1963년 보물 3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대원각사비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후 보물 2호가 된 원각사 동종은 숭례문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종루로 옮겨져 오랫동안 서울 도성의 시계 역할을 하였다. 1895년 종루가 보신각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보신각 동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제야의 종’으로도 활약하다가 1985년 퇴역한 뒤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진 속 아름다운 탑이 12m의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1971년 사진과 달리, 2025년 사진에는 탑이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 있어 답답해 보인다. 산성비 등에 의한 훼손을 막으려고 1998년 보호막을 설치했다. 19세기 말에 이 탑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윗부분 3개 층이 땅에 내려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일본에 가져가려다가 너무 무거워 실패한 흔적이란 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으며, 1946년 미군 공병대의 도움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1890년대 서울에 처음 생긴 근대공원 탑골공원은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도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탑골’ ‘탑동’ ‘파고다’ 등의 명칭은 모두 원각사지십층석탑에서 유래했다. 세조의 불심으로 조성된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도성의 중심을 지키면서 파란만장한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705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전 민족이 궐기한 3·1운동은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이를 출발점으로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탑골공원은 원래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다.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 신앙이 깊었던 세조가 근처의 민가 200여 호를 허물어 절을 크게 새로 짓고,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원각사는 도성 안 최고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구리 5만 근으로 만든 거대한 동종, 분신 사리와 ‘원각경’을 봉안한 높은 대리석 탑이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이곳으로 궁중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는 장악원을 옮기며 연방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의 유흥에 동원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도록 함으로써 원각사는 절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연산군이 실각한 후, 건물들은 헐려 다른 관공서를 짓는 데 쓰였고, 1962년 국보 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십층석탑과 1963년 보물 3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대원각사비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후 보물 2호가 된 원각사 동종은 숭례문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종루로 옮겨져 오랫동안 서울 도성의 시계 역할을 하였다. 1895년 종루가 보신각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보신각 동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제야의 종’으로도 활약하다가 1985년 퇴역한 뒤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진 속 아름다운 탑이 12m의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1971년 사진과 달리, 2025년 사진에는 탑이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 있어 답답해 보인다. 산성비 등에 의한 훼손을 막으려고 1998년 보호막을 설치했다. 19세기 말에 이 탑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윗부분 3개 층이 땅에 내려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일본에 가져가려다가 너무 무거워 실패한 흔적이란 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으며, 1946년 미군 공병대의 도움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1890년대 서울에 처음 생긴 근대공원 탑골공원은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도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탑골’ ‘탑동’ ‘파고다’ 등의 명칭은 모두 원각사지십층석탑에서 유래했다. 세조의 불심으로 조성된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도성의 중심을 지키면서 파란만장한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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