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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77회) <서울시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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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7회 작성일 23-06-2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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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반세기 전후, 서울시청 앞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하면 확연히 사라진 것은 분수대(2004년)이고 생겨난 것은 서울프라자호텔(1976년)과 서울광장(2004년)이다. 여전히 변함없는 건, 국보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세종대로다. 사람으로 치면 심장의 피를 온몸에 전달해주는 동맥 같은 큰길(大路)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대가 남대문을 통과하여 이 길을 따라 경복궁에 도착했다. 조선의 심장이 도륙되면서 조선 왕의 권력은 멈췄다.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서울함락, 서울수복을 했던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 길은 주요 작전도로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중들이 대통령 이승만이 살고 있는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몰려간 것도 이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이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사망한 이한열 학생을 추모하는 100만 인파가 서울시청 앞을 가득 메웠던 1987년, 이 길은 사라졌다. 그 대신 광장이 생겨났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뒷골목에서 숨죽여 ‘민주주의’라는 글자를 남몰래 쓰던, ‘타는 목마름으로’ 시(詩)에 나왔던 자들이 당당하게 나선 것이다.

평상시, 차량 통행만 가능한 도로가 유사시, 사람이 걷는 길이 되면서 광장으로 변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숨 쉴 공간이 트였다. 누구나 발언을 하며 내뿜는 구호와 함께 힘찬 박수 소리에 닫혀 있던 광장이 깨어나 술렁거렸다. 시청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항쟁에 동조하는 경적을 울렸고 대학가 대자보와 유인물은 “모이자! 시청으로” 동참을 호소했다. 길 위에서 돌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전두환 파쇼권력의 심장부(청와대)를 관통하려 했다.

그들은 길을 달렸다. 앞만 보고 달렸다. 그들에게 뒷걸음질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역사의 필연성’을 믿었고 그들에게 그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었다. 그러나 1987년 6월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이라는 개량적 타협으로 시위대는 해산됐고 광장은 소멸했다.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민중들에게 주어진 건 또다시, 뒷골목에서나 흐느끼는 삶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6년이 지났다. 그동안 달라진 건, 정치군인에서 민간인도 대통령에 선출됐다는 것뿐, ‘인간답게 살고자’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향하는 노동자 시위대 모습은 2023년 사진에서도 변함없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2303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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