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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73회)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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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0회 작성일 23-05-2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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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대표)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장악하던 ‘무신정권’의 시기. 유라시아의 역사를 바꿔 놓을 정복전쟁을 시작한 몽골제국은 1231년 고려를 침공한다. 이로써 28년간 9차례 침략으로 이어지는 ‘여몽전쟁’이 발발한다. 수도 개경이 포위당한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복하고 ‘화친’을 맺는다.

하지만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했고, 이에 2차 침략이 발발한다. 강화도 천도는 결사항전의 표시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우 무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이미 군사력의 절대적 격차를 경험한 조정에서는 전란을 끝내자는 ‘현실론’이 제기됐지만 정권은 권력의 붕괴를 우려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정의 강화도 칩거 27년 동안 육지는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용감한 장수와 백성들의 대몽 항전이 있었던 반면, 지방 관리들과 농민 및 노비들은 민심을 잃은 조정에 대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몽골군은 국토를 유린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1235년 3차 전쟁이 발발하자 조정은 주민들을 험준한 산성이나 외딴 섬으로 이주시키는 ‘입보 정책’으로 몽골에 저항토록 했지만 백성들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조정은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했다.

11세기에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대장경이 만들어졌는데, 이 ‘초조(初彫)대장경’이 몽골 2차 침략 때 불타버렸다. 이에 몽골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대장경의 복원, 즉 ‘재조대장경’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1251년에 마침내 완성된 목재 경판 수는 무려 8만1258장. 이리하여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강화도에 있던 대장경은 1398년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해인사\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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