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61회) "마이산 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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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23-03-05 09:55본문
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전북의 동북부, 충남·북과 경남·북에 잇닿아 있는 산악 지역을 ‘무진장’이라 부른다. 무주, 진안, 장수, 세 곳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불교에서 유래한 우리말 무진장이 ‘다함이 없이 굉장히 많음’을 뜻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산과 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삼국 시대 백제의 땅이었지만 대가야 전성기 때 이곳을 복속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가야토기가 다수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무주에 덕유산이 있다면 진안에는 마이산이 있다. 말(馬)의 귀(耳)처럼 생긴 암봉 두 개가 솟아 있다 해서 태종 이방원이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마이산은 진안 읍내 어디서나 잘 보이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혹자는 철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고도 한다. 봄에는 쌍돛대 같이 보인다고 ‘돛대봉’, 여름에는 용의 뿔과 같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돌산에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 등으로 불린다.
봉우리에 암수를 붙여 동쪽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는데, 암마이봉 아래에 사진 속의 ‘탑사’가 있다. 원뿔형 혹은 일자형으로 된 80여개의 돌탑이 있어서 탑사라 한다. 이 돌탑은 전북 임실 출신 이갑룡이 1885년 마이산에 입산하여 수도하던 중 산신의 계시를 받아 1900년 무렵부터 혼자 쌓은 것이라고 한다.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 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돌탑을, 그것도 어른 키의 3배 높이에 달하는 탑을 어찌 혼자 쌓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당연히 이것은 꾸며낸 얘기다. 1801년부터 진안에 살았던 하립이 쓴 ‘담락당운집’에는 마이산에 “탑이 줄줄이 서 있다”는 시가 이미 있다.
오랜 시간, 뭇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돌탑이 어찌하여 축지법을 쓰는 도인이 만국평화와 항일구국의 정신으로 홀로 쌓았다는 신화로 변신했는가는, 1971년 사진에는 없는 대웅전 옆의 산신전 안을 보면 알 수 있다. 산신전 안에는 이갑룡 상이 모셔져 있는데 옆의 산신보다 두 배 이상이 크다. 곧 이갑룡이 신인 것이다.
어지러운 시대, 힘겨운 삶 속에서 기복(祈福)의 욕망은, 태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꿋꿋한 돌탑처럼 이갑룡 ‘처사’의 신화를 굳건하게 창조해 낸 것이다. 재물과 무병장수, 자손 번창의 욕망 한가운데 누가 ‘신’인들 무슨 상관이랴?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030300015
전북의 동북부, 충남·북과 경남·북에 잇닿아 있는 산악 지역을 ‘무진장’이라 부른다. 무주, 진안, 장수, 세 곳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불교에서 유래한 우리말 무진장이 ‘다함이 없이 굉장히 많음’을 뜻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산과 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삼국 시대 백제의 땅이었지만 대가야 전성기 때 이곳을 복속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가야토기가 다수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무주에 덕유산이 있다면 진안에는 마이산이 있다. 말(馬)의 귀(耳)처럼 생긴 암봉 두 개가 솟아 있다 해서 태종 이방원이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마이산은 진안 읍내 어디서나 잘 보이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혹자는 철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고도 한다. 봄에는 쌍돛대 같이 보인다고 ‘돛대봉’, 여름에는 용의 뿔과 같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돌산에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 등으로 불린다.
봉우리에 암수를 붙여 동쪽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는데, 암마이봉 아래에 사진 속의 ‘탑사’가 있다. 원뿔형 혹은 일자형으로 된 80여개의 돌탑이 있어서 탑사라 한다. 이 돌탑은 전북 임실 출신 이갑룡이 1885년 마이산에 입산하여 수도하던 중 산신의 계시를 받아 1900년 무렵부터 혼자 쌓은 것이라고 한다.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 탑을 쌓았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돌탑을, 그것도 어른 키의 3배 높이에 달하는 탑을 어찌 혼자 쌓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당연히 이것은 꾸며낸 얘기다. 1801년부터 진안에 살았던 하립이 쓴 ‘담락당운집’에는 마이산에 “탑이 줄줄이 서 있다”는 시가 이미 있다.
오랜 시간, 뭇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돌탑이 어찌하여 축지법을 쓰는 도인이 만국평화와 항일구국의 정신으로 홀로 쌓았다는 신화로 변신했는가는, 1971년 사진에는 없는 대웅전 옆의 산신전 안을 보면 알 수 있다. 산신전 안에는 이갑룡 상이 모셔져 있는데 옆의 산신보다 두 배 이상이 크다. 곧 이갑룡이 신인 것이다.
어지러운 시대, 힘겨운 삶 속에서 기복(祈福)의 욕망은, 태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꿋꿋한 돌탑처럼 이갑룡 ‘처사’의 신화를 굳건하게 창조해 낸 것이다. 재물과 무병장수, 자손 번창의 욕망 한가운데 누가 ‘신’인들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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