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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42회) "안중근 의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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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9회 작성일 22-10-23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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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42회) "안중근 의사 동상"

글쓴이 : 정치영 (한국학 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 교수)

다가오는 10월26일에는 유난히 역사적 사건이 많았다. ‘10·26’ 하면, 흔히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사건을 떠올리지만,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린 날도 10월26일이었다고 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왜군에게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도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26일이었다. 이들 외에 10월26일에 일어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일이다. 최근 김훈이 쓴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초의 동상은 1959년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으며, 일본인들의 성지였던 남산 기슭의 경성신사(京城神社) 터, 즉 현재의 숭의여자대학교 교정에 세웠다. 1967년에 이 동상은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던 자리로 옮겨졌다. 경성신사 자리에 처음 안 의사 동상을 조성하고, 다시 일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조선신궁 터로 동상을 옮긴 뜻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71년 사진에는 이 동상의 옆 모습과 1970년 건립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살짝 보인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으나, 이후에 새로 발굴된 안 의사 사진과 동상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의견이 제시되자, 1974년 김경승이 다시 제작한 동상을 같은 자리에 세우게 된다. 1959년의 첫 번째 동상은 안 의사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임을 기려 대한민국 육군의 교육시설인 광주 상무대로 옮겨졌고, 상무대 이전에 따라 지금은 전남 장성에 서 있다.

1974년 건립된 두 번째 동상은 그 후 제작자 김경승의 친일 행적 때문에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2010년 조각가 이용덕이 제작한 세 번째 동상이 새로 세워지고, 두 번째 동상은 첫 번째 동상이 있던 숭의여자대학교로 옮겨졌다.



2021년의 사진은 세 번째 동상으로,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태극기를 꺼내든 장면을 담았다. 세 번째 동상은 영원토록 이 자리에 서서 안중근 의사가 소망한 ‘동양 평화’의 의미를 후세 사람에게 일깨워주길 바란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02103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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