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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34회) "강릉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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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07회 작성일 22-08-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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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신사임당과 이이의 생가인 강릉 오죽헌에 가면, 정문에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 탄생지’란 쑥스러운 문구와 함께 5만원권과 5천원권이 걸려 있는 포토존이 있다. 신사임당이 훌륭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인물로서 지폐의 도안에, 그것도 아들과 함께 들어간 경위로는 부족하다. 조선시대에는 허난설헌 같은 훌륭한 시인도 있지 않았는가? 결국 사임당이 이이의 어머니로서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받들어진 것이 ‘모자 동반 화폐 인물’이 탄생한 결정적 근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 여성을 남편 혹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모양처’는 메이지유신 이후 생긴 ‘양처현모’론을 일제가 수입해서 조선에 강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다. 더 나아가 서인-노론의 태두인 이이를 신격화하기 위한 송시열 이래 노론의 집요한 시도도 개입되어 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가면 ‘판관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사임당이 강릉 오죽헌에서 용꿈을 꾸고 이곳에 와서 이이를 잉태했다고 한다. 출생지가 아니라 잉태지를 칭송하는 것은 보통 신성과 관련되며, 용꿈은 왕을 상징하는 꿈이다. 이런 스토리텔링을 거쳐 신사임당은 성역화된 인물로 등극한다.

지금의 오죽헌 주변 모습은 성역화 공사의 결과이다. 1975년 유신 시절 ‘오죽헌 정화사업’이 시작되었고, 6개월 만에 이곳은 반가의 아담한 별채에서 콘크리트가 발라진 거대한 궁궐로 변모하였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맨 왼쪽의 오죽헌과 문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화사업’ 당시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는데, 그래서 1971년 사진 오른쪽의 건물이 50년 뒤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문 오른쪽에 없던 지붕이 보이는데 이것은 ‘정화사업’ 때 신축된 ‘문성사’라는 사당이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썼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축대와 담장의 모양, 계단의 장식도 바뀌었고 흙과 함께 숨 쉬어온 나무도 흔적 없이 베어버렸다. 흙 위를 덮은 보도블록 위에는 기념탑이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데, 이름하여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다. 철거된 몇몇 건물은 1996년에 복원되었지만 이곳에 자행된 무자비한 폭력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서인의 쿠데타로 인조반정이 성공했고 5·16쿠데타 주역은 서인의 태두인 율곡 생가를 ‘정화’했다면,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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