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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30회)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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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1회 작성일 22-07-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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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원)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건축술로 지어진 견고한 성이다.

50년 전, 남한산성 동문 사진의 성곽 계단에 사람들이 서 있는데 지금은 출입금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계단에는 병사들이 서 있었다.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황제가 남한산성을 보고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감탄했다. 백제시대부터 쌓은 성으로 해발 500m에 경사가 가파르고 험준한 지형으로 한양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런 성(城)이 어떻게 쉽게 함락됐을까?

 
“기병들이 말을 타고 속전속결로 6일 만에 한양에 진군하면 조선왕은 강화도 피란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해상 전투에 취약한 청나라의 군사작전이었다. 조선의 대비책은 ‘적이 나타나면 성으로 숨는다’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관대작들은 벼슬자리를 매관매직했고 전투실무에 뛰어난 장군들을 한직으로 쫓아내면서 그 자리에 내 사람을 앉혔다. 인조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만 몰입했고 남 탓만 하는 우유부단한 왕이었다. “전하! 내가 하면 로맨스이옵고 남이 하면 불륜이옵니다.” 통촉해달라는 측근 무리들의 사리사욕 당쟁이 임진왜란 발발 40년 만에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남한산성에는 우물과 냇가도 있어 장기전 조건이 충분했지만 군량미를 성 안으로 옮겨놓지 못했다. 평소 전투 매뉴얼을 갖추지 못했기에 벌어진 치명적 실수였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 조선 병사들이 짚신발로 성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을 때 조정 대신들은 주전파, 주화파로 나뉘어 ‘언 발에 오줌누기식’ 토론을 지루하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남한산성 문이 열렸다. 인조는 자기 발로 걸어 나와 청나라 황제 앞에 머리를 박고 항복했다. 남한산성이 함락된 건 청나라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다. 조선의 썩어빠진 지배계급과 인조의 무능함에 성문 빗장이 풀렸다. 성문이 열리면서 백성들은 지옥을 경험했다. 60만명이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왔을 때, 환향녀(還鄕女)의 화냥년과, 화냥년이 낳은 오랑캐 자식 ‘호로자식’이라는 경멸만이 그들을 맞이했다. 백성을 ‘자기 발뒤꿈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일삼는 정쟁으로 민생도탄의 지옥문이 열리면 죽어나는 건 민중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7290300015#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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