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49회) "살곶이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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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0회 작성일 22-12-09 11:15본문
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서울의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변에 600년이 된 돌다리가 놓여 있다. 이름하여 ‘살곶이다리’다. 한자로는 전곶교(箭串橋)라 쓰는데 여기서 전(箭)은 화살을 이르는 말이다. 야사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서 은둔하다 마지못해 한양으로 되돌아오는 행차를, 태종이 이곳 중랑천까지 나와 맞이했다. 이때 태종의 신하 하륜이 그늘막 기둥 뒤에서 부왕에게 절을 하라고 조언했다.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화살은 기둥을 맞혔고, 그제야 이성계는 하늘의 뜻이라 탄식했다 한다. 그 이후 이곳을 ‘살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다리가 만들어진 경위도 태종과 관련이 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 후 지금의 서울시 자양동에 있었던 낙천정과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었던 풍양궁을 오가며 거처했는데, 그곳을 가려면 여기 중랑천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편리한 왕래를 위해 태종은 세종 2년(1420년)에 이 다리를 짓게 했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공사가 중단되었다. 후에 교통상의 중요성이 제기되어 결국 성종 14년(1483년)에 비로소 완성했다고 한다.
1971년의 살곶이다리 사진을 보면 다리 너머는 허허벌판이다. 한양대 쪽에서 바라본 풍경이므로 허허벌판은 대규모 공업 지대로 변신하기 전의 성수동이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 사이에 놓여 홍수가 나면 일시적으로 섬이 되었기 때문에 ‘뚝섬’이라 불렸다. 반세기가 지난 살곶이다리 남동쪽 모습은 상전벽해다. 고층 건물 숲 앞 동부간선도로와 내부순환로 고가를 지나가는 자동차가 빽빽하다. 사적 제160호로 지정된 1967년에 세운 비석은 1971년 사진에는 보이지만, 지금은 2011년의 보물 제1738호 지정 비석과 함께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살곶이다리는 길이 76m, 너비 6m로,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중 가장 길다. 1925년 대홍수 때 다리 일부가 유실되어 방치되다가 1972년에 보수했는데, 하천의 폭이 넓어져 다리를 늘려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복원사업이 으레 그랬듯이 ‘콘크리트’를 씌워 잇대어 붙였다. 2021년 사진에서 풀숲 위를 지나가는 다리가 원래의 살곶이다리이고, 앞부분 중랑천 물이 흐르는 곳이 콘크리트 다리다. 야경이 멋있는 곳이니, 춥지 않은 밤에 한번 산책 나가보기를 권한다.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살곶이다리청계천중랑천중랑천변조선시대 돌다리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2090300015
서울의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변에 600년이 된 돌다리가 놓여 있다. 이름하여 ‘살곶이다리’다. 한자로는 전곶교(箭串橋)라 쓰는데 여기서 전(箭)은 화살을 이르는 말이다. 야사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서 은둔하다 마지못해 한양으로 되돌아오는 행차를, 태종이 이곳 중랑천까지 나와 맞이했다. 이때 태종의 신하 하륜이 그늘막 기둥 뒤에서 부왕에게 절을 하라고 조언했다.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화살은 기둥을 맞혔고, 그제야 이성계는 하늘의 뜻이라 탄식했다 한다. 그 이후 이곳을 ‘살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다리가 만들어진 경위도 태종과 관련이 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 후 지금의 서울시 자양동에 있었던 낙천정과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었던 풍양궁을 오가며 거처했는데, 그곳을 가려면 여기 중랑천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편리한 왕래를 위해 태종은 세종 2년(1420년)에 이 다리를 짓게 했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공사가 중단되었다. 후에 교통상의 중요성이 제기되어 결국 성종 14년(1483년)에 비로소 완성했다고 한다.
1971년의 살곶이다리 사진을 보면 다리 너머는 허허벌판이다. 한양대 쪽에서 바라본 풍경이므로 허허벌판은 대규모 공업 지대로 변신하기 전의 성수동이다. 이곳은 한강과 중랑천 사이에 놓여 홍수가 나면 일시적으로 섬이 되었기 때문에 ‘뚝섬’이라 불렸다. 반세기가 지난 살곶이다리 남동쪽 모습은 상전벽해다. 고층 건물 숲 앞 동부간선도로와 내부순환로 고가를 지나가는 자동차가 빽빽하다. 사적 제160호로 지정된 1967년에 세운 비석은 1971년 사진에는 보이지만, 지금은 2011년의 보물 제1738호 지정 비석과 함께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살곶이다리는 길이 76m, 너비 6m로,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중 가장 길다. 1925년 대홍수 때 다리 일부가 유실되어 방치되다가 1972년에 보수했는데, 하천의 폭이 넓어져 다리를 늘려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복원사업이 으레 그랬듯이 ‘콘크리트’를 씌워 잇대어 붙였다. 2021년 사진에서 풀숲 위를 지나가는 다리가 원래의 살곶이다리이고, 앞부분 중랑천 물이 흐르는 곳이 콘크리트 다리다. 야경이 멋있는 곳이니, 춥지 않은 밤에 한번 산책 나가보기를 권한다.
*이 칼럼에 게재된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살곶이다리청계천중랑천중랑천변조선시대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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