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109회) "강화대교" 양민학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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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7회 작성일 24-02-09 19:24본문
글쓴이 :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1971년에 촬영된 강화대교(구 대교) 사진과 동일한 구도의 현재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강화대교에 도착했다. 육지와 섬(강화도)을 연결하는 강화대교는 1969년 2차선 도로로 완공되었다가 늘어나는 차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폐쇄됐다. 현재는 사람과 자전거만 다닐 수 있고 구 대교라 부른다. 2024년 사진을 보면 오른쪽이 구 대교이고 왼쪽이 신 대교다.
사진을 찍으려 구 대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다가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지’라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방치된 낡은 표지판은 글자의 페인트 빛이 바래져서 그 내용을 간신히 읽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부역(협력)했다는 강화도 주민 60명(70세 노인, 갓난아기 포함)을 강화향토 방위특공대가 재판절차도 없이 갑곶선착장에서 총살했다. 갑곶선착장은 구 대교 다리 밑이다.
사진기 뷰파인더에 구 대교가 보이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부역자들이 나타났다. 갑곶선착장 가는 길은 가팔라서 어린이 부역자들은 엄마 손을 잡아야 했다. 삐삐선(군용통신선)에 양손이 묶인 채, 부역자들은 바다를 향해 일렬로 섰다. 손목이 묶이지 않은 부역자도 있었다. 엄마 등에 업혀온 갓난아기다.
강화향토 방위특공대 우익청년들이 뒤에서 총부리를 겨눴다. 치매 노인 부역자에게는 바로 눈앞의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염하(鹽河)강은 안 보이고 세찬 물소리만 들렸다.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몽골군이 도강할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염하강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았다. 만조 때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몽골군에게 말해준 고려인은 그것 때문에 고려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고 처음 본 외국인(몽골군)이 다가오자 무서워 도망친 자는 몽골군한테 죽었다. 밀물, 썰물처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양민들이 내어줄 것은 ‘목숨’밖에 없었다.
1951년 1월7일, 학살자들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날을 택했다. 갯벌보다 더 짙은 그날 밤, 총성이 울렸다. 부역자들의 시신은 빠르게 밀려가는 썰물에 바다로 흘러갔다. 한 구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갑곶선착장은 살해 증거가 남지 않는 최적의 학살지였다. 국가는 야만의 기억에 ‘화해’라는 덧칠만 하고 염하강에 수장된 그날의 진실은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내려왔던 비탈길을 올라갔다. 부역자들이 다시는 밟지 못한 길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2081820015
1971년에 촬영된 강화대교(구 대교) 사진과 동일한 구도의 현재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강화대교에 도착했다. 육지와 섬(강화도)을 연결하는 강화대교는 1969년 2차선 도로로 완공되었다가 늘어나는 차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폐쇄됐다. 현재는 사람과 자전거만 다닐 수 있고 구 대교라 부른다. 2024년 사진을 보면 오른쪽이 구 대교이고 왼쪽이 신 대교다.
사진을 찍으려 구 대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다가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지’라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방치된 낡은 표지판은 글자의 페인트 빛이 바래져서 그 내용을 간신히 읽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부역(협력)했다는 강화도 주민 60명(70세 노인, 갓난아기 포함)을 강화향토 방위특공대가 재판절차도 없이 갑곶선착장에서 총살했다. 갑곶선착장은 구 대교 다리 밑이다.
사진기 뷰파인더에 구 대교가 보이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부역자들이 나타났다. 갑곶선착장 가는 길은 가팔라서 어린이 부역자들은 엄마 손을 잡아야 했다. 삐삐선(군용통신선)에 양손이 묶인 채, 부역자들은 바다를 향해 일렬로 섰다. 손목이 묶이지 않은 부역자도 있었다. 엄마 등에 업혀온 갓난아기다.
강화향토 방위특공대 우익청년들이 뒤에서 총부리를 겨눴다. 치매 노인 부역자에게는 바로 눈앞의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염하(鹽河)강은 안 보이고 세찬 물소리만 들렸다.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 몽골군이 도강할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염하강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았다. 만조 때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몽골군에게 말해준 고려인은 그것 때문에 고려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고 처음 본 외국인(몽골군)이 다가오자 무서워 도망친 자는 몽골군한테 죽었다. 밀물, 썰물처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양민들이 내어줄 것은 ‘목숨’밖에 없었다.
1951년 1월7일, 학살자들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날을 택했다. 갯벌보다 더 짙은 그날 밤, 총성이 울렸다. 부역자들의 시신은 빠르게 밀려가는 썰물에 바다로 흘러갔다. 한 구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갑곶선착장은 살해 증거가 남지 않는 최적의 학살지였다. 국가는 야만의 기억에 ‘화해’라는 덧칠만 하고 염하강에 수장된 그날의 진실은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내려왔던 비탈길을 올라갔다. 부역자들이 다시는 밟지 못한 길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208182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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