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76회) <행주산성 행주대첩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9회 작성일 23-06-18 11:29본문
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대표)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때 처음 쌓은 성으로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 35년(1602년)에 권율 장군 부하들이 1.88m의 대첩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사진의 대첩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초건비’이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첩비각 바로 위, 덕양산 정상에는 15.2m의 웅장한 행주대첩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1963년 ‘문화재 정화사업’ 때 세운 ‘재건비’이다.
초건비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 반면, 재건비의 ‘행주대첩비’란 글자는 1963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썼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정자는 ‘덕양정’으로 역시 정화사업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저 멀리 아파트가 빽빽한 곳은 1971년 사진에는 허허벌판인데 지금의 방화동과 마곡지구이다.
행주대첩은 1593년 3월14일 하루 동안의 전투를 말하는데, 전라도 관찰사 권율 장군이 이끄는 약 3000명의 정규군과 승병이 일본군 3만명을 격퇴했다. 당시 성안의 여성들이 덮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했고, 그래서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 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기 한참 전인 1517년의 책에 이미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보이니 낭설이다. 거꾸로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이란 말이 나왔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행주(幸州)는 고려 초기부터 있던 지명이다. 그냥 두 단어가 같을 뿐이다.
또 행주산성 주변엔 민가가 없고 돌연한 전투라 민간인이 참가할 수도 없었다. 여성들이 치마로 돌을 나르고 백성들이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건 민중의 상상일 뿐이다. 처참한 전쟁의 상흔이 눈물겨운 ‘행주’의 승전 스토리로 치유된 것이다.
“(할머니는) 북한산 봉우리를 볏짚으로 감싸 군량미를 쌓은 노적가리처럼 위장하고, 냇물에 석회가루를 풀어 흘려보낸 후, 왜군들에게 ‘조선군 주둔지에는 산더미 같은 군량미가 쌓였는데, 이 뿌연 물은 북한산에 주둔한 수만명 군사의 밥 짓는 쌀뜨물이다’라고 속여 허기진 배를 석회물로 채우게 하고 복통 설사를 일으켜 사기를 꺾어 퇴각시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밥할머니는 의병대장으로 격상된다. “여자들에게 앞치마에 돌을 주워 나르게 하고, 군인들이 돌을 무기로 쓰게 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수인(手印)이 ‘시무외인’인 것으로 볼 때, 원래 어떤 절의 ‘약사여래상’이었을 석불이 ‘행주’를 매개로 여성 의병대장 동상으로 변화되는 민중적 서사는 드라마틱하다고 해야 할까, 슬프다고 해야 할까?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160300015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때 처음 쌓은 성으로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 35년(1602년)에 권율 장군 부하들이 1.88m의 대첩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사진의 대첩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초건비’이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첩비각 바로 위, 덕양산 정상에는 15.2m의 웅장한 행주대첩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1963년 ‘문화재 정화사업’ 때 세운 ‘재건비’이다.
초건비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 반면, 재건비의 ‘행주대첩비’란 글자는 1963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썼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정자는 ‘덕양정’으로 역시 정화사업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저 멀리 아파트가 빽빽한 곳은 1971년 사진에는 허허벌판인데 지금의 방화동과 마곡지구이다.
행주대첩은 1593년 3월14일 하루 동안의 전투를 말하는데, 전라도 관찰사 권율 장군이 이끄는 약 3000명의 정규군과 승병이 일본군 3만명을 격퇴했다. 당시 성안의 여성들이 덮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했고, 그래서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 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기 한참 전인 1517년의 책에 이미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보이니 낭설이다. 거꾸로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이란 말이 나왔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행주(幸州)는 고려 초기부터 있던 지명이다. 그냥 두 단어가 같을 뿐이다.
또 행주산성 주변엔 민가가 없고 돌연한 전투라 민간인이 참가할 수도 없었다. 여성들이 치마로 돌을 나르고 백성들이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건 민중의 상상일 뿐이다. 처참한 전쟁의 상흔이 눈물겨운 ‘행주’의 승전 스토리로 치유된 것이다.
“(할머니는) 북한산 봉우리를 볏짚으로 감싸 군량미를 쌓은 노적가리처럼 위장하고, 냇물에 석회가루를 풀어 흘려보낸 후, 왜군들에게 ‘조선군 주둔지에는 산더미 같은 군량미가 쌓였는데, 이 뿌연 물은 북한산에 주둔한 수만명 군사의 밥 짓는 쌀뜨물이다’라고 속여 허기진 배를 석회물로 채우게 하고 복통 설사를 일으켜 사기를 꺾어 퇴각시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밥할머니는 의병대장으로 격상된다. “여자들에게 앞치마에 돌을 주워 나르게 하고, 군인들이 돌을 무기로 쓰게 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수인(手印)이 ‘시무외인’인 것으로 볼 때, 원래 어떤 절의 ‘약사여래상’이었을 석불이 ‘행주’를 매개로 여성 의병대장 동상으로 변화되는 민중적 서사는 드라마틱하다고 해야 할까, 슬프다고 해야 할까?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6160300015
관련링크
- 이전글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77회) <서울시청 앞> 23.06.24
- 다음글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75회) <창경원 온실> 23.06.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