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81회) <나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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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1회 작성일 23-07-27 21:09본문
글쓴이 : 정치영 (한국학중앙학 연구원 인문지리학 교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가면 바위 절벽에 뚫려 있는 석굴 모양의 문을 볼 수 있다. 30번 국도가 지나가는 이 문 위에는 사진과 같이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가 통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범상치 않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나제통문이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 있는 관문(關門)이었기 때문이며, 삼국통일 전쟁 때에는 김유신이 이 문을 통해 왕래해 ‘통일문(統一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1970년대 국사 교과서에는 나제통문 사진이 실려 있었으며,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도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였음은 맞다. 고려시대까지 문의 동쪽인 무풍면은 무풍현(茂豊縣), 서쪽인 무주읍은 주계현(朱溪縣)이었는데, 조선 초기인 1414년에 하나로 합쳐서 무주현(茂朱縣)을 만들었다. 원래 무풍현은 신라 땅, 주계현은 백제 땅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문 동쪽의 무풍면 주민들의 말씨는 경상도에 가깝고, 서쪽의 무주읍 주민들은 전라도 방언을 사용하여 언어지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제통문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당시 자원 개발을 위해 무주와 철도 교통의 요지였던 경상북도 김천과의 교통편의를 도모하려고 석모산(石帽山) 암벽에 터널을 뚫고, 사진에서 보듯이 그 앞 원당천(元塘川)에 설천교(雪川橋)라는 다리를 놓아 신작로를 개설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 터널을 ‘기니 미굴’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 입구에 해당하는 이 굴을 ‘무주구천동 33경(景)’의 ‘제1경’으로 지정하였고, 이때 기니 미굴 대신 ‘나제통문’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지역의 명물을 잘 포장하는 ‘장소 마케팅’으로 시작된 일이 예상치 못한 ‘역사 왜곡’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서 사진이 사라졌고 수행여행객의 발길은 끊겼지만, 아직도 옛 전설에 이끌려 일부러 찾는 이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유래가 어떻든 나제통문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가면 바위 절벽에 뚫려 있는 석굴 모양의 문을 볼 수 있다. 30번 국도가 지나가는 이 문 위에는 사진과 같이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가 통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범상치 않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나제통문이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 있는 관문(關門)이었기 때문이며, 삼국통일 전쟁 때에는 김유신이 이 문을 통해 왕래해 ‘통일문(統一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1970년대 국사 교과서에는 나제통문 사진이 실려 있었으며,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도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이 지역이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였음은 맞다. 고려시대까지 문의 동쪽인 무풍면은 무풍현(茂豊縣), 서쪽인 무주읍은 주계현(朱溪縣)이었는데, 조선 초기인 1414년에 하나로 합쳐서 무주현(茂朱縣)을 만들었다. 원래 무풍현은 신라 땅, 주계현은 백제 땅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문 동쪽의 무풍면 주민들의 말씨는 경상도에 가깝고, 서쪽의 무주읍 주민들은 전라도 방언을 사용하여 언어지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제통문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당시 자원 개발을 위해 무주와 철도 교통의 요지였던 경상북도 김천과의 교통편의를 도모하려고 석모산(石帽山) 암벽에 터널을 뚫고, 사진에서 보듯이 그 앞 원당천(元塘川)에 설천교(雪川橋)라는 다리를 놓아 신작로를 개설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 터널을 ‘기니 미굴’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 입구에 해당하는 이 굴을 ‘무주구천동 33경(景)’의 ‘제1경’으로 지정하였고, 이때 기니 미굴 대신 ‘나제통문’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지역의 명물을 잘 포장하는 ‘장소 마케팅’으로 시작된 일이 예상치 못한 ‘역사 왜곡’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서 사진이 사라졌고 수행여행객의 발길은 끊겼지만, 아직도 옛 전설에 이끌려 일부러 찾는 이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유래가 어떻든 나제통문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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