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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1회)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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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3회 작성일 24-05-0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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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옥례야! 너, 가수해도 되겠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일본인이 식모살이하는 조선인 소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고 가수가 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영화필름을 실은 배가 제주도에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극장에서 영화 상영을 못해, 그때 너를 무대에 세울게.”

제주바다에 풍랑이 심하게 치던 날, 제주도 극장에서 영화 상영 대신 유랑극단 공연이 펼쳐졌고 무대가 바뀌는 막간마다 노래하는 막간가수로 이옥례가 데뷔했다. 그 후, 이름이 점점 알려지면서 가수지망생들이 그토록 원하던 ‘히트’의 여신이 이옥례에게 손짓을 했다.

당대 최고의 가수인 고복수, 남인수 등이 소속된 오케레코드사가 있었다. 현재로 치면 SM, 하이브 같은 메이저 기획사였다. 이 회사가 1935년에 공모한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에서 ‘목포의 사랑’ 가사가 당선됐다. 오케레코드사는 일제에 수탈당하는 조선인들의 서러움을 건드려서 레코드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노래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꿨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를 가수로 고복수가 1순위였지만 목포 관련 노래를 목포 출신 가수가 불러야 초반 인기몰이가 된다는 마케팅 전략으로 이옥례가 낙점되었다. 목포에서 출생한 이옥례는 ‘이난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다시 태어났고 ‘목포의 눈물’이 히트하면서 영화에까지 출연했다.

1969년 ‘목포의 눈물’을 기념하는 ‘이난영 노래비’가 목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유달산에 세워졌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호남을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 전신)의 응원가는 ‘목포의 눈물’이었다.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가사에 구슬픈 뽕짝 리듬으로 전혀 신이 나지 않는 노래가 어떻게 프로야구단 응원가가 됐을까? 박정희 집권 이후 지역차별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양민학살을 당하고 숨죽여 살아가던 전라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곳은 야구장밖에 없었다. 그 한(恨) 서린 외침이 ‘목포의 눈물’이었다.

하이브의 경영권 찬탈이 논란이다. 이난영이 10대로 환생한다면 아이돌 가수가 될 수 있을까? 대형 기획사는 연습생 시절 혹독하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공장에서 물건 만들 듯, 노래를 문화가 아닌 상품으로 찍어내고 있다. 대중들의 정서가 담긴 멜로디와 가사보다는 기존 음반의 익숙한 음원을 그대로 따서 만든 샘플링 음악에 아이돌 가수가 입을 맞추고 있다. 립싱크만 해도 가수다. 이난영은 간드러진 목소리 창법을 구사하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자기 색깔을 고집하면 아이돌 가수 데뷔는커녕, 기획사 연습생으로도 뽑히지 않는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502203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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