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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98회) "경성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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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1회 작성일 23-11-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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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제 이름은 경성전차입니다. 고종 임금이 명성황후의 능이 있는 홍릉 행차 시, 가마로 이동하는 것보다 전차로 가는 게 경비가 저렴하다고 해서 전차가 1899년에 개통됐습니다. 저는 전기로 움직이는 노면 전차로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시내 철로 운행을 했습니다.”

“운행 잘하던 전차 철로가 왜 갑자기 땅에 묻혔죠?”

“광복 이후, 서울의 자동차와 버스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도로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전차가 교통 방해자가 됐습니다. 그러자 전차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 존슨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맞춰 서울시장이 전차 철로가 지저분하다고 1966년에 그대로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공구리를 쳤습니다.”

“공구리라는 일본말은 삼가 주세요.”

“죄송합니다. 경성의 모든 전차를 일본인들이 운전해 일본말이 몸에 뱄습니다.”

“검사님! 공소사실의 요지를 진술해 주세요.”

“피고인 전차는 두 건의 살인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1899년 전차 개통식 후 일주일 만에 탑골공원 앞에서 다섯 살짜리 어린이를 치어 죽였습니다. 현장에서 즉사한 아이의 아버지와 성난 군중이 전차를 도끼로 찍고 불태웠습니다. 두 번째 살인은 철로를 목침처럼 베고 노상에서 자고 있던 두 명의 머리 위를 전차가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피고인은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나요?”

“인정합니다.”

“재판을 마치려는데 피고인 더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사건 발생 당시, 경성에는 신호등, 가로등, 횡단보도가 거의 부재했습니다.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정차장도 별도로 없었습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정원 초과의 전차가 멈추기도 전에 사람들은 올라타고 뛰어내렸습니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아이들이 저를 보고 신기하다고 뛰어오면 반가움보다 급브레이크에 가슴이 덜컹거렸습니다. 그리고 철로에 누워 자다가 변을 당한 분들은 막차가 지연된 것을 모른 채, 마지막 전차가 지나갔다고 오판해 발생한 사고입니다. 판사님! 현재 두 대의 전차만 남아 있는데요, 저는 반세기 넘게 방치되어 있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습니다. 전차가 문명의 이기(利器)에서 흉기(凶器)로 조롱받고 퇴장당하면서 저는 평생 달려온 철로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최후진술 마치겠습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32017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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