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25회)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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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18회 작성일 22-06-24 09:45본문
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대표)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인천행을 타고 끝까지 달리면 종점인 인천역에 닿는다. 역에서 나오면 알록달록하게 치장한 차이나타운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차이나타운을 가로지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나타난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장이 되었고, 이후 재판, 치안, 과세 등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거류 지역인 ‘조계’(租界)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인천에는 일본, 청국,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조계가 있었는데, 차이나타운은 바로 청국 조계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이 개항한 지 5년이 지난 1888년 각국의 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휴식처로 조성되었다. 다시 말해 자유공원은 19세기 말의 격렬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 공원을 ‘각국(各國)공원’이라 불렀고, 일제강점기에는 ‘서(西)공원’, 해방 이후에는 ‘만국(萬國)공원’이 되었으며 1957년에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공원의 이름이 ‘자유’ 공원이 된 것은 같은 해에 맥아더 동상이 이곳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해 초기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동상 건립문에는 “1950년 9월15일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맥아더 동상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소련에 대한 미국의 승리의 상징인 것이다.
이 ‘자유’의 상징에 2018년 방화가 있었다. 올해 4월에는 동상에 빨간색 스프레이가 뿌려졌다. 수많은 동상 철거 시위도 그 앞에서 벌어졌다. 역사적 인물의 동상은 동상 건립자들의 이념과 역사인식이 담겨 있다. 동상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상 훼손은 자신이 반대편에 서 있음을 적극 표현하는 방법이다.
전쟁은 항상 역사 해석의 또 다른 전장이었다. 하지만 이 해석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전쟁을 일으킨 세력은 전쟁이 가져온 모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의 자세이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6240300115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인천행을 타고 끝까지 달리면 종점인 인천역에 닿는다. 역에서 나오면 알록달록하게 치장한 차이나타운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차이나타운을 가로지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나타난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장이 되었고, 이후 재판, 치안, 과세 등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거류 지역인 ‘조계’(租界)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인천에는 일본, 청국,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조계가 있었는데, 차이나타운은 바로 청국 조계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이 개항한 지 5년이 지난 1888년 각국의 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휴식처로 조성되었다. 다시 말해 자유공원은 19세기 말의 격렬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 공원을 ‘각국(各國)공원’이라 불렀고, 일제강점기에는 ‘서(西)공원’, 해방 이후에는 ‘만국(萬國)공원’이 되었으며 1957년에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공원의 이름이 ‘자유’ 공원이 된 것은 같은 해에 맥아더 동상이 이곳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해 초기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동상 건립문에는 “1950년 9월15일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맥아더 동상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소련에 대한 미국의 승리의 상징인 것이다.
이 ‘자유’의 상징에 2018년 방화가 있었다. 올해 4월에는 동상에 빨간색 스프레이가 뿌려졌다. 수많은 동상 철거 시위도 그 앞에서 벌어졌다. 역사적 인물의 동상은 동상 건립자들의 이념과 역사인식이 담겨 있다. 동상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상 훼손은 자신이 반대편에 서 있음을 적극 표현하는 방법이다.
전쟁은 항상 역사 해석의 또 다른 전장이었다. 하지만 이 해석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전쟁을 일으킨 세력은 전쟁이 가져온 모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의 자세이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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