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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회) 서울 시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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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94회 작성일 22-03-2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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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1972년 12월2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이 막을 내린 지 7분 뒤, 전기 합선으로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남진, 김추자 등 최고 인기가수와 구봉서, 곽규석 등 당대의 코미디언이 모두 있었고 관객만 4000명이 넘었다. 소방차 72대가 동원되어 2시간 만에 진화에 성공했으나 회관은 전소되고 53명이 사망했다. 1971년의 사진에 그 모습이 선명한 이 건물의 이름은 지금은 사라진 서울시민회관이다.
덕수궁 옆에 현재 서울시의회로 사용되는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부민관’이었다. 부민관은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종합 문화공연장으로 기능했는데, 해방 후에는 미군 사령부가 사용하다가 수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게 되어 서울에는 이렇다 할 공연장이 없었다. 이에 1956년 ‘우남회관’이란 이름으로 기공을 시작해 1961년 11월 ‘시민회관’이 드디어 개관하니, 이로써 서울 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공연·문화 공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민회관에서는 주로 가수들의 공연이 열렸는데, 특히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가수들의 독무대였다. 이 시기 프랑스 68혁명과 미국의 반전운동 및 히피 문화는 한국의 청년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9년 시민회관에서는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열려 신중현 등 당시의 사이키델릭 그룹들이 총출동해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특히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고 하여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김추자가 1971년 매니저에게 테러를 당해 얼굴을 100바늘 이상 꿰매고도 4일 만에 붕대를 칭칭 감고 컴백쇼를 한 사건은 유명하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대중문화의 영광을 함께한 서울시민회관이 전소되고 방치되던 공간에 1978년 새 공연장이 건립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은 과거의 시민회관과 달리 오케스트라, 오페라 등 클래식 음악과 연극 등을 중심으로 공연하는 ‘고품격’ 공연장이 되었다. 1989년 패티김이 콘서트를 갖게 되어 ‘금기’가 깨졌는데, 이를 둘러싸고 당시 큰 논쟁이 벌어졌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종문화회관의 대중문화 수용도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때, 정치는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325030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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