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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46회)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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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22-11-1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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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두 개의 중요한 사적이 있다. 하나는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갇혀서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이다. 공원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또 하나의 사적이 보이는데, 바로 독립문이다. 기공식은 1896년 11월21일에 열렸는데, 그 1년 전에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있었고 그 1년 후에는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으니 독립문은 어지러운 구한말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것이다.

독립문 사진을 잘 보면 앞에 두 개의 큰 주춧돌이 보인다. 이것은 영은문(迎恩門)의 주초로서 원래 그 위에는 나무로 된 홍살문과 청기와가 얹혀 있었다. ‘영은’은 “은혜를 베푼 사신을 영접한다”는 의미인데, 중국의 사신을 조선 임금이 친히 영접하던 ‘모화루’(慕華樓) 앞에 영은문이 있었던 것이다. ‘모화’란 “중화를 흠모한다”는 의미이므로, 원래 이곳은 조선의 사대(事大) 정신을 올곧이 체현하고 있던 장소였던 것이다.

1895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고종은 청나라의 역사적 기억을 지우는 작업에 돌입한다. 하나는 병자호란의 굴욕이 아로새겨진 ‘삼전도비’를 무너뜨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은문을 헐어 버린 것이다.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돌아와 조선 조정의 후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한 후,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청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건축물 건립을 호소하니, 그것이 곧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어진 지금의 독립문이다.

이처럼 독립문의 ‘독립’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실제로 훗날 친일파가 된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독립문의 현판 글씨도 이완용이 썼다는 설이 파다하다. 하지만 서재필은 더 넓은 의미의 독립을 생각했다. “이 문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 러시아, 모든 유럽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1971년의 독립문 사진 뒤에는 길 위의 자동차가 보이지만 50년 뒤의 사진에는 공원만이 보인다. 1979년 성산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고가 차도 건설 등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를 북서쪽으로 70m 이동한 것이다. 그런 시절이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11803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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