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40회) "절두산 성지” > 자료요청

본문 바로가기
사이드메뉴 열기

자료요청 HOME

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40회) "절두산 성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63회 작성일 22-10-07 06:11

본문

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서울 지하철 합정역 7번 출구에 내려 지하철 길을 따라 한강 방향으로 10분을 걸어가면 절두산 성지에 이른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잠두봉(蠶頭峰)’이었다.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봉우리 모양이라는 뜻이다.

1866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이곳에서 200여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인들의 목이 베어졌다. 참수가 사진 중앙에 보이는 절벽 위에서 벌어졌는지, 절벽 앞의 양화나루터에서 벌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이후 이곳의 이름은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철종 재위 때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여 많은 선교사가 활동했고, 그 결과 철종 말기에 천주교인은 2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1864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실권을 쥐게 된 흥선대원군도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한 특별한 반감이 없었고,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영국의 힘을 빌려 막아볼 생각도 있어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을 계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조정에도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자 흥선대원군은 돌연 천주교 탄압으로 선회했다.

1866년 3월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수천명이 학살되니 이것이 곧 ‘병인박해’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프랑스 함대가 9월과 10월에 두 차례 조선을 침공해 ‘병인양요’라고 불렀다. 졸지에 천주교인들은 적과 내통한 대역 분자가 되어 버렸다. 흥선대원군은 무자비했다. “서양 오랑캐가 더렵혔던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 처형은 진행되고, 잠두봉 아래 한강은 핏빛으로 변했다.

끔찍한 역사가 기록된 이 부지를 천주교가 1956년에 매입하여 성지 조성을 시작했다. 1966년 병인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을 기공했고 이듬해에 축성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기념 성당이다. 1971년과 2021년의 사진에 보이는 절두산 성지의 모습은 큰 변화가 없다. 다만 절벽 아래에는 한강이 흐르지 않고 한강시민공원의 자전거길이 지나간다. 제2 한강교, 지금의 양화대교는 지하철 2호선의 고가철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비극의 역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잠두봉 절벽은 그 고고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0070300085#c2b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