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15회) 4.19 학생혁명 기념탑 > 자료요청

본문 바로가기
사이드메뉴 열기

자료요청 HOME

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15회) 4.19 학생혁명 기념탑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63회 작성일 22-04-15 08:53

본문

글쓴이 :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4·19학생혁명기념탑은 혁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 정신을 희석화하고 박제화하기 위해 세워졌다. 박정희 장군은 1961년 군사쿠데타 성공 이후 자신의 ‘군사혁명’이 4·19 정신을 계승했다며 정당화했다. 4·19의 숭고한 뜻을 저버린 무능하고 부패한 장면 정권에 대한 ‘혁명’이라는 것이다. 쿠데타 직후 장준하 등이 5·16을 지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군정은 1962년 5차 개헌의 헌법 전문에 최초로 “4·19의거”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쿠데타 세력의 통치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전 국민이 청신한 기풍을 배양하고 신생활체제를 견지하며 반공이념을 확고히” 한다는 기치 아래 그 산하에 재건국민운동본부(현 새마을금고의 전신)를 설립했는데, 이 재건국민운동본부가 1962년 기념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1963년 9월20일에 제막한 것이 이 기념탑이다. 기념탑은 높이 21m의 화강석 탑주 7개로 구성되어 있고 탑 뒤편 좌우에 각 10개씩 7m 높이의 화강석 만장이 세워져 있다. 탑 안에는 청동 ‘환조’ 군상이, 탑 좌우에는 화강석 ‘부조’ 군상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환조 군상 앞에는 시인 이은상이 쓴 비문이 있다.

 
이은상이 3·15 부정선거로 이어진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라는 명문구에도 불구하고 이 비문은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더 안타까운 것은 기념탑 자체를 설계·조각한 이가 대표적 친일 미술가인 김경승이라는 것이다. 그는 1942년 조선미전에 총독상을 탄 ‘여명’ 등 대동아 건설과 근로정신대를 칭송하는 작품을 연달아 발표했고 친일 단체에서도 적극 활동했다. 탑 너머에는 4·19 혁명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묘지가 있어, 묘지와 탑을 함께 보고 있으면 쓴맛이 올라온다.

김영삼 정부 들어 4·19 묘지 성역화 사업이 실시되어 기념관과 상징조형물들이 세워졌다. 박목월 등 유명 시인 12인의 추모시가 새겨진 ‘수호예찬의 비’도 건립되었는데, 문학사적으로 4월 혁명문학을 대표하는 김수영·신동엽 등의 시는 없다. 1980년대 이래 4월이 되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항상 이곳을 방문했지만, 과연 이곳은 무엇일까?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은 이곳을 부수라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4·19에 참여한 당시 초등학생의 시가 가슴을 친다.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 (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415030007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