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 제공 사진으로 쓰여진 변택주 선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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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245회 작성일 19-11-30 15:58본문
http://m.cafe.daum.net/littlepeacelib/TueY/493?svc=cafeapp
글쓴이 : 변택주 (책 '법정 나를 물들이다' 저자)
등 뒤에서 지켜보는 눈길
내가 아닌데 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저 가까이에 있었다는 까닭만으로 다들 내가 그랬다고 여기며 싸늘한 눈총을 보낼 때가 있다. 나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멀쩡한데, 곁불 좀 쬐었을 뿐인 나만 밀려나 ‘그게 어찌 내 탓만이야?’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앞뒤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 하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무엇이 나를 억누르고 있어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 비명을 지르려고 아무리 외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 목소릴 귀담아듣기는 그만두고 듣는 시늉만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가 있다. 이토록 내가 외딴 섬 같다고 느낄 때마다 새기던 스승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듯이 아무리 나쁜 처지에 놓일지라도 우리 삶에는 숨은 뜻이 있다. 우리가 요즘 겪고 있는, 직장을 잃고 한데 나앉은 괴로움에 담긴 뜻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살아야 할 까닭이 있는 사람은 어떤 형편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
이 세상을 고통 바다라고 했듯이, 산다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하기 마련이며, 살아남는다는 것은 괴로움 속에서 그 뜻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살아온 길목마다 내 등 뒤에서 나를 속속들이 지켜보는 ‘눈길’이 있음을 굳게 믿는다. 그 눈길은 이따금 내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엉뚱한 생각을 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꿈속에서 그 목소리가 나를 불러 깨울 때도 있다. 그 눈길은 지금 살아 계시거나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나 아버지일 수도 있고 할머니나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또는 사람마다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수호천사일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일 수도 있다. 무어라 부르든 이름에는 상관없이 그 눈길은 늘 나를,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 눈길은 이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낙담하며 고개를 떨구는 우리 모습이 아니라, 꿋꿋하게 넘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말씀이라 스승이 하신 말씀과 낱말이나 말투가 달라졌을지 몰라 조심스럽다. 그러나 흐름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믿기에 그대로 털어놓는다.
내게도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며 보듬어주는 눈길이 있다. 힘든 일을 겪기에 앞서 품을 나눠주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늘 나란히 걸어주시는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까닭을 늘 일러주던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가 퍽 안쓰러우신 듯하다. 아이 걱정을 할 때면 꿈에 나타나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울러 주고, 좋은 뜻을 세워 가는 길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아우르지 못해 쩔쩔맬 때 꿈에 목소리로 나타나 쭉 나아가라고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손사래도 치신다.
꿈을 흔히 환이라고 한다. 환은 헛것,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기루를 찍은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헛것이 아주 헛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꿈은 제 마음이 비친 그림자이다. 꿈이, 또는 내 안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가 헛것이든 아니든 짚지 않아도 괜찮다. 스승 말씀처럼 나를 지켜보는 그 눈길이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낙담하며 고개를 떨구는 내 모습이 아니라, 꿋꿋하게 괴로움을 넘어서는 모습을 바란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고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도 오직 한군데 하소연할 수 있는 곳만 있어도 너끈히 살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종교가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하나둘 그토록 믿어오던 종교를 떠나고 있다. 어쩐 일일까? 너른 품이 그리워 찾아든 종교가 하소연도 받아주지 못할 만큼 옹색해졌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인 줄 알고 갔더니 이곳보다 더 바싹 마른 모래가 기다리고 있는 신기루 같아지고 만 셈이다. 종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종교란 언덕에 기댄다는 말이고 그 그늘에 들어가 쉰다는 말이며 그 품에 들어가 안긴다는 말이며 토끼가 목마를 때 달려가 목을 축이는 옹달샘처럼 진리에 마른 목을 축여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종교가 메말라 바닥이 쩍쩍 갈라지다 못해 사막으로 바뀌어 들어가 쉬기는커녕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뜨겁기만 하니 ‘어마 뜨거라!’ 하고 떠나는 것이다.
종교도 품을 내어주지 못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까이 있는 모자라는 이들끼리 어깨동무하며 서로서로 그늘이 되어 품어주며 언덕이 되어주는 길이다. 나도 삶이 버겁고 힘들지만 네 버거움을 들어주며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면서 네 설움 내 설움을 나누며 함께 울고 웃어주는 사이. 별것도 아닌 일로 같이 흥분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같이 성을 내고, 뻔히 흰소리 친다 싶더라도 “그래, 멋져!” 하며 받아들이는 사이.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운 데도 굽은 내 어깨를 다독여줄 때 “너뿐이야. 너밖에 없어” 하고 고마워하면서 그이에게도 힘을 실어주는 사이. 혼자 울면 서러운데 같이 우니 덜 서러운 사이. 어울리는 사이. 남이라고 여기던 이를 ‘너’로 돌려세워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길만이 버겁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 오아시스를 이루는 일이 아닐까.
위의 사진, ‘신기루’ 빛그림으로, 카피레프트 식구인 꽃비 고천성 님이 셀수스협동조합에 "마음껏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작품이다.
글쓴이 : 변택주 (책 '법정 나를 물들이다' 저자)
등 뒤에서 지켜보는 눈길
내가 아닌데 나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저 가까이에 있었다는 까닭만으로 다들 내가 그랬다고 여기며 싸늘한 눈총을 보낼 때가 있다. 나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멀쩡한데, 곁불 좀 쬐었을 뿐인 나만 밀려나 ‘그게 어찌 내 탓만이야?’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앞뒤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 하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무엇이 나를 억누르고 있어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 비명을 지르려고 아무리 외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 목소릴 귀담아듣기는 그만두고 듣는 시늉만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가 있다. 이토록 내가 외딴 섬 같다고 느낄 때마다 새기던 스승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듯이 아무리 나쁜 처지에 놓일지라도 우리 삶에는 숨은 뜻이 있다. 우리가 요즘 겪고 있는, 직장을 잃고 한데 나앉은 괴로움에 담긴 뜻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살아야 할 까닭이 있는 사람은 어떤 형편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
이 세상을 고통 바다라고 했듯이, 산다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하기 마련이며, 살아남는다는 것은 괴로움 속에서 그 뜻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살아온 길목마다 내 등 뒤에서 나를 속속들이 지켜보는 ‘눈길’이 있음을 굳게 믿는다. 그 눈길은 이따금 내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엉뚱한 생각을 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꿈속에서 그 목소리가 나를 불러 깨울 때도 있다. 그 눈길은 지금 살아 계시거나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나 아버지일 수도 있고 할머니나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또는 사람마다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수호천사일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일 수도 있다. 무어라 부르든 이름에는 상관없이 그 눈길은 늘 나를,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 눈길은 이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낙담하며 고개를 떨구는 우리 모습이 아니라, 꿋꿋하게 넘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말씀이라 스승이 하신 말씀과 낱말이나 말투가 달라졌을지 몰라 조심스럽다. 그러나 흐름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믿기에 그대로 털어놓는다.
내게도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며 보듬어주는 눈길이 있다. 힘든 일을 겪기에 앞서 품을 나눠주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늘 나란히 걸어주시는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까닭을 늘 일러주던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가 퍽 안쓰러우신 듯하다. 아이 걱정을 할 때면 꿈에 나타나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울러 주고, 좋은 뜻을 세워 가는 길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아우르지 못해 쩔쩔맬 때 꿈에 목소리로 나타나 쭉 나아가라고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손사래도 치신다.
꿈을 흔히 환이라고 한다. 환은 헛것,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기루를 찍은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헛것이 아주 헛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꿈은 제 마음이 비친 그림자이다. 꿈이, 또는 내 안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가 헛것이든 아니든 짚지 않아도 괜찮다. 스승 말씀처럼 나를 지켜보는 그 눈길이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낙담하며 고개를 떨구는 내 모습이 아니라, 꿋꿋하게 괴로움을 넘어서는 모습을 바란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고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도 오직 한군데 하소연할 수 있는 곳만 있어도 너끈히 살아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종교가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하나둘 그토록 믿어오던 종교를 떠나고 있다. 어쩐 일일까? 너른 품이 그리워 찾아든 종교가 하소연도 받아주지 못할 만큼 옹색해졌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인 줄 알고 갔더니 이곳보다 더 바싹 마른 모래가 기다리고 있는 신기루 같아지고 만 셈이다. 종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종교란 언덕에 기댄다는 말이고 그 그늘에 들어가 쉰다는 말이며 그 품에 들어가 안긴다는 말이며 토끼가 목마를 때 달려가 목을 축이는 옹달샘처럼 진리에 마른 목을 축여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종교가 메말라 바닥이 쩍쩍 갈라지다 못해 사막으로 바뀌어 들어가 쉬기는커녕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뜨겁기만 하니 ‘어마 뜨거라!’ 하고 떠나는 것이다.
종교도 품을 내어주지 못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까이 있는 모자라는 이들끼리 어깨동무하며 서로서로 그늘이 되어 품어주며 언덕이 되어주는 길이다. 나도 삶이 버겁고 힘들지만 네 버거움을 들어주며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면서 네 설움 내 설움을 나누며 함께 울고 웃어주는 사이. 별것도 아닌 일로 같이 흥분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같이 성을 내고, 뻔히 흰소리 친다 싶더라도 “그래, 멋져!” 하며 받아들이는 사이.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운 데도 굽은 내 어깨를 다독여줄 때 “너뿐이야. 너밖에 없어” 하고 고마워하면서 그이에게도 힘을 실어주는 사이. 혼자 울면 서러운데 같이 우니 덜 서러운 사이. 어울리는 사이. 남이라고 여기던 이를 ‘너’로 돌려세워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길만이 버겁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 오아시스를 이루는 일이 아닐까.
위의 사진, ‘신기루’ 빛그림으로, 카피레프트 식구인 꽃비 고천성 님이 셀수스협동조합에 "마음껏 가져다 쓰라"고 내놓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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