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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조합 경향신문 연재 <반세기 기록의 기억> (13회) 창경원 밤벚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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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4회 작성일 22-04-0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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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기록의 기억>  "창경원 밤벚꽃 놀이"

글쓴이 : 김형진

1911년 우리들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낯선 조선 땅에 이주했습니다. 우리들의 이름은 일본에서 사쿠라인데 조선인들은 ‘벚꽃’이라고 불렀습니다.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걸었던 창경원 뜰에 어린 묘목으로 우리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예전에는 창경궁이라는 조선 궁궐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 일본이 동물원을 만들면서 조선 궁궐은 유원지로 전락했고 조선 왕의 지위는 동물원 원장쯤으로 강등되었다고 합니다.
무럭무럭 자라난 우리들이 꽃망울을 터뜨리자 1924년부터 왕의 거처를 일반 백성들도 입장권을 끊고 출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일렬종대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우리들 가지에 매달아놓은 백열등이 창경원의 밤을 밝히면서 상춘객들은 ‘밤 벚꽃놀이’ 향연을 만끽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개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창경원은 동물원, 식물원 그리고 놀이시설까지 겸비한 조선(한국)의 최고 테마파크였지만 ‘암표상’ ‘소매치기’ ‘애정행각’ ‘미아 발생’ 등의 문구가 벚꽃 만개 소식과 함께 신문을 장식했습니다.
우리들의 개화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창경원 밤 벚꽃놀이’ 야간 개장 인파의 모습이 담긴 1971년 사진은 요즘 방탄소년단 콘서트의 인산인해를 방불케 합니다. 6·25전쟁 후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한 가정에 보통 3~4명의 자식들이 있다 보니 부모가 잠시 한눈을 팔면 아이를 잃어버리는 미아 발생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엄마, 아버지의 손을 놓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처럼 벚꽃잎을 우수수 떨어뜨립니다.
사람들에게 꽃길을 걷게 해주던 우리들의 뿌리가 1983년에 뽑혀 나갔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의 피를 광주 금남로에 꽃잎처럼 뿌리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창경궁 복원’ 프로젝트로 벚꽃나무를 여의도 등에 옮겼고 우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한국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심어졌습니다. 조선 왕이 나라를 잃어버린 비통한 마음으로 산책했고 ‘밤 벚꽃놀이’ 때 부모들이 아이를 잃어버린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현판을 바꿨지만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잊고, 잃어버렸습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서 처단하지 못한 친일파 무리들이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권력과 자본을 장악하고 있는데 일본 꽃이라는 벚나무를 베어냈다고 일제의 잔재가 사라졌다는 생각은 춘곤증의 정신 헷갈림입니다. 벚꽃이 피고 지는 건 기억하면서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의무는 망각했습니다.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401030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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